희망과 절망, 그 속에서 줄다리기

2018. 9. 10.

그물 (The net, 2016)

그물(The Net,2016)
드라마 한국 104분 2016년 개봉 김기덕
류승범(남철우), 이원근(오진우), 김영민(조사관)



영화로 만든 소설 광장이 아닐까. 그토록 흡사하고 하고자 하는 얘기도 닮아 있다. 특별한 건 류승범의 연기 정도.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195~60년대의 이야기가 2010년대에도 그대로 통용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남과 북이 대치된 지금과 같은 상황 하에서는 언제든지, 또 누구든지 이와 같은 그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2018. 8. 29.

자살 클럽 (Suicide Club, 2002)


당신은 당신과 관계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관계자입니까.
당신은 죽어도 애인과의 관계가 바뀌지 않습니다.
당신은 죽으면 당신과의 관계는 바뀝니까.

그 하나의 질문을 위해 여러 고어적인 요소를 곳곳에 배치했다. B급 감수성과 잔혹한 설정(여고생 54명의 집단자살). 모든 것이 당시 암울한 일본 사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독특하지만 개연성이 없고 대단히 마이너한 연출을 보인다. 영화는 당신은 당신과 관계하고 있습니까라는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가혹함으로 무장했다.

2018. 7. 4.

독전 (Believer, 2018)


영화 속에 '왜'가 없다. 살고 죽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동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 내면에의 충동이 사라진 캐릭터는 인형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질 뿐이다. 원호(조진웅)가 이선생을 평생토록 좇은 이유가 불충분하고, 때문에 그가 경찰 옷을 벗는 이유도 불충분하게 느껴지고, 결말 또한 불충분하게 느껴진다. 만들다 만 음식을 먹은 느낌이랄까. 이 원인 없는 결말은 꼭 앙코 없는 찐빵 같다는 느낌을 준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다. 각자 놓인 상황 하에서 각자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것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하며 얽히고설킨 이야기 속에서 관객들은 숨 졸이며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일반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각 캐릭터가 따로 논다. 아마 각 캐릭터 간의 관계가 오밀조밀하게 엮여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원호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데, 같은 팀 동료라고 해서 다를 것 없다. 특히 여형사는 마지막 액션신 외에 왜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2018. 2. 11.

엉망

 모든 시작은 엉망이었다. 엉망에서 시작해 엉망으로 끝났다. 어느 것도 엉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수중에 쥐어든 일상이란 일상은 모두 그랬다. 어쩌면 내 존재 자체가 엉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갈피를 못잡고 흩날리고 엉켜들고만 있었다. 

  '오늘 밤이 네 삶의 마지막 생이라면 넌 무엇을 할래?'

  길을 걷다 문득 자문했다. 아무런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었다. '그럼 일주일은?'이라고 되물었지만 똑같았다. 굳게 닫힌 입은 움직일 줄 몰랐다. 누군가에게 하루의 시간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일 테지만, 내게는 그 시간이 무감각하게만 느껴졌다.

  오후 4시였다. 오랫동안 연락 없던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계약을 승계할 세입자가 계약서를 쓰러 왔다는 것이다. 중개인이 목에 힘주어 말하길, "계약금을 세입자끼리 주고 받으면 안 됩니다. 계약금은 새로 들어올 입주자가 집주인에게 내야지, 나갈 세입자에게 내면 저희가 계약서를 써드릴 수 없어요. 법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계약서를 새로 쓴다는 것, 중개인이 계약 승계에 개입하는 것, 계약금을 따지고 드는 것 등 집주인이 세입자끼리 알아서 하시라했던 말과 달랐다. 헝클어진 머릿속 생각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갔다. 

  직접 얘기를 주고 받은 것이 아니라서 자세한 상황은 모르나 아직 시간의 텀이 있고 서로 말만 오간 상황이라 확실히 해두자는 차원에서 계약금을 받은 것이라 말했지만 중개인은 막무가내였다. 어쨌든 법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집주인이 세입자간 승계형식으로 처리해라고 했다고 들었다고 말을 해도 자꾸 법이 그렇다는 말만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입주자끼리 해결하라고 했던 말과 달리, 집주인은 나와의 계약을 승계처리하는 것이 아닌 새로 들어올 입주자와 새로 계약서를 쓰겠다고 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중개인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말만 들었으면 간단히 끝났을 문제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라는 내 말에 답답한 듯 중개인은 전과 같은 말만 되풀이하다가 대뜸 큰소리로 "계약금을 주시면 돼요. 그럼 끝나는 일이에요."라고 일갈했다.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받은 계약금을 되돌려주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말을 끊어대며 하고싶은 말만 내뱉은 상대의 태도에 기분나빴을 뿐이었다. 뒷배경을 잠시 얘기해주는 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동생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다. 이후에도 짜증난 마음 때문에 엉망이 된 머릿속은 더욱 난삽해졌다.

  요즘의 나는 엉망으로 시작해 엉망으로 끝난다.  

2017. 11. 3.

이상(李箱) 『날개』

저주스러운 예술가는 쉽사리 권태에 빠진다. 살아있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 곧 '권태'다. 권태는 사람을 드러누워 생각만 하게 하고, 멍하니 물결처럼 흘러가는 주변을 보고 있게만 하고, 살아있지만 죽어있게 만든다. 권태가 곧 절망과 다르지 않음은 권태에 빠져본 사람이 잘 알 것이다. 이상은 권태로운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가 곧 권태에 빠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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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괘하오. 이런 때어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의례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공할 상식의 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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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세계에 짓눌린 자아는 끊임없이 분열한다. 분열한 자아는 자신의 내면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것이 누군가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쏟아내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다. 그의 독백과 같은 짧은 첫 글은 '나'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기도,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성격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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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이 가운데 장지로 말미암아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그것이 내 운명의 상징이었던 것을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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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에는 두 인물이 나온다. '나'와 '안해'. 이 두 인물은 어쩐지 상반된 성격을 지닌 듯 보인다. '나'라는 인간은 무료하고, 권태에 빠져있고, 아내 외에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으며, 그런 인간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인간이다. 물론 돈에도 관심 없다. 이렇게 지내는 삶이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나'라는 인물이 하는 행동이라곤 이불 속에서 공상에 잠기거나, 시와 같은 것들을 죽죽 써내려가는 것, 아내의 휘향찬란한 아내의 방에서 화장품을 가지고 노는 것뿐이다. '내'가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다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도 싶었다. 나에게는 인간사회가 스스러웠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스스로 벌레가 되기로 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실제로 그는 볕이 들지 않는 방에서, 축축한 이불과 빈대를 벗삼아 지낸다. 밥도 아내가 주지 않으면 이틀을 굶을 만큼 '생'에 대한 욕구가 없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듯, 그야말로 박제된 인간과 같은 모습이다. 반면 아내는 그녀는 볕이 잘 드는 방에서 끊임없이 내객을 맞이하며 돈을 번다. 그녀는 애초에 돈에 밝고, 그 돈으로 화려한 옷과 화장품이 가득한, 이국적인 향이 물씬 나는 방에서 지내는 인물이다. '나'와는 판이하게 다른 인물인 것이다.


충돌.

분열로만 끝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나'의 뒷방에 자꾸만 몇 푼씩 놓고 간다. 돈을 쓸 데도 없고, 쓸 엄두도 안 나 고 벙어리에 모아둔다. 그러다 어느날 '나'는 변소에 고 벙어리를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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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버리고 싶었다. (...) 벙어리도 돈도 사실에는 안해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내게는 애초부터 의미가 전연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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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애초에 타협하지 않는 인물이다. 분열된 자아는 합병될 가능성이 없다. 저주스러운 현실에 짓눌린 예술가는, 더욱이 스스로 예술가적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면 현실과 타협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아내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돈을 어떻게 버는지, 직업은 있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아내가 방구석 머리맡에 놓아둔 돈을 쥐고 밖으로 나간다. 도대체 이해되지 않으면, 현실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거리에서 일시적인 흥분을 느끼지만, 이내 지치고 만다. 다리가 몹시 아파오고, 돈을 한 푼도 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곤 아내에게 5원을 그대로 돌려주면서 묘한 쾌감을 느낀다. 돈을 주는 맛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불행한 일이 있다. 자기 방으로 가려면 아내의 방을 지나쳐야 했는데, 들어서는 길에 아내가 내객을 맞이하는 현장을 보고 만 것이다. 아내는 노기가 가득한 눈초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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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에게 돈을 주고 안해 방에서 자보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좋았지만 만일 잘못해서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갔다가 안해의 눈총을 맞는 것은 그것은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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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은 끊임없었다. 자정 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한 아내의 말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외출에서 비와 추위에 못이겨 자정 전에 들어가고 말았고, 또다시 내객을 맞이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곤 그는 감기에 걸려 앓아 눕는다. 아내는 꼼짝말고 약을 먹으라고 알약을 건넨다. 그런 후 그는 한 달 내내 잠만 잔다. 이상하다고 여긴 그는 방을 뒤적거린다. 아내가 자신에게 준 것이 아스피린이 아니라 수면제의 일종인 아달린임을 알게 된다. '나'는 아내에게 의심을 품는다. 서서히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인가?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했는가? 그는 산으로 내달린다. 거기서 하늘을 보며 온갖 생각에 잠긴다. 문득, 자신이 잘못 알았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고, 냅다 집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는 내객을 상대하던 아내와 마주친다. 아내는 이제 노기어린 눈빛만 보내지 않는다. 아내는 이제 술 먹고, 계집질하고 다니냐며 흥분하여 '나'를 내동댕이친다. 


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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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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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과 아내가 절대 합치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나'와 아내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인식한다. 돈에 잠깐 흥미를 느꼈지만 그것이 자신을 압살하게 만들다니, 자본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자본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낱 권태로운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감춰져 있던 '차갑고 무서운 본 모습'을 알게 된 아내로부터 벗어날 결심을 한다. 미쓰코시 백화점으로 향한다. 차가운 현실과, 자기에게도 흐르던 야수적 본능으로부터 벗어나 훨훨 날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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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족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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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안다. 벗어날 수 없음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는 더 살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결국 박제가 될 수밖에 없음을... 마지막에 날아보자고, 다시 날개야 돋아라고 하는 말은 다시는 날지 못하는 현실에 절규하는 소리와 다름없다. 


책을 덮는 시점.

이상의 날개는 이상의 자전적 사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 날개는 기생 금홍과의 삶에서 겪은 체험을 그 근간으로 한다. 실제 이상은 일찍이 폐결핵으로 고통받았고 다방 '제비', '학', '식스나인' 등의 사업도 벌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도쿄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행색이 불량하여 사상불온혐의로 체포된다. 그러나 곧 폐병이 악화되어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27세.

천재는 요절한다고 한다. 세상이 천재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이상의 시와 소설이 난해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날개만큼은 그렇지 않다. 비교적 쉽게 읽힌다. (비교적이다 비교적...) 그래서 그 시절에 『오감도』가 신문에 연재될 때 연재를 그만하라며 독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지만, 이 소설은 흥행했는지도 모른다. 소설 『날개』를 읽으면 그의 산문 『권태』가 생각난다. 두 세계 속의 '나'가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지독한 현실은 고통스러운 권태를 낳는 법이다. 고독한 예술가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해 죽는다. 세상을 너무 깊게 보기 때문에 죽는다. 결국 그들은 세상에 났을 때부터 죽어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2017. 10. 20.

*
그제 부모님과 함께 온천천을 걸었다. 밤은 맑았고 사람은 많았다. 시원하지만 쌀쌀하지 않은 바람이 두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다시 일하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환히 웃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안도하셨다. "마음이 놓인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미래와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게 좋은 거야." 아버지는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늘 내게 "너의 뒤에는 가족이 있으니까 너무 절망하지 말고..."라는 말을 하셨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얼굴에 근심을 지워드린 것만으로 나는 기뻤다.

엄마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문제는 역시 건강이다. "매일 병원에 있다 보면, 중요한 건 건강 밖에 없다는 생각만 든다." 엄마는 그 말을 하며 땅을 바라보셨다. 할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웃게 만들고 싶은 사람은 그들인데... 아직은 요원하다.

*
모든 처음은 어렵다. 첫 고백, 첫 직장, 첫 요리... 익숙지 않은 것과 조우하는 날에는 늘 몸이 먼저 움츠러들고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낯선 감정이 안정을 깨고 들어오는 것이다. 너무 도망가지도, 너무 밀착하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 지금 필요한 것은 그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쌓아나갈 때도 시간이 필요하듯 새로운 일도 그런 듯하다.

현재의 나는 책을 읽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한다. 낯섬과의 조우는 일상의 실종을 낳았다. 조금 답답했다. 그래서 더 걸었으나 걷는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머릿속에 온통 문학이 자리하길 바랐으나 요즘의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나중에 안정이 되면...' '언젠가 준비가 되면...'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날이 올까. 오랜 아픔 속에 있을 때 자주 듣던 말이 있다. "지금은 힘들어도 조만간엔 나아질 거야. 그러니 희망을 잃지 말고..." "힘든 것도 순간이야. 비가 그치면 해가 뜰 테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그 말은 과연 위로가 될까. 나는 모두 말장난처럼 느껴졌다. 힘든 일은 실존하고, 그 실존하는 사실 때문에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이다. 폭력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마음에 남긴다. 그것은 평생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다. 그 흔적이 사람을 평생 동안 괴롭힌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뻔한 말이 소용없는 이유다. 순간을 잊기 위한 마취제 같은 그런 말들... 우리에게 대증요법보다 근본치료가 중요한 건 아닐까. 결국 문제는 지금이다. 지금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앞으로도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고,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늘 문학을 '지금' 해야 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진정 원하는 삶을 사는 '지금'이다. 단지 지금, 지금, 지금! 인간의 삶에서 미래는 없다.

2017. 10. 10.

편견이 깃든 사회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 아주머니가 내 피부를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무심한 듯 나를 보는 시선을 힐끗 쳐다 보았다. 아주머니는 내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나를 더듬듯 관찰했다. "자네도 아토피가 있네. 많이 심하네?" 아주머니는 말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머니는 그제야 자기 딸도 아토피라고, 고생을 많이 해왔다고 말했다. '아, 그래서 쳐다봤구나.' 오랜만이었다. 나를 다 이해한다는 그 눈빛.

나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아주머니는 한참 동안 말했다. "우리 딸이 여기 대학생이거든. 근데 아토피가 심해서 1년씩 쉬고 그랬어. 그런데 혹시 어성초 비누 알아? 그래, 그거. 어성초비누 그걸 쓰고, 근데 학생은 약 같은 거 뭐 먹는 거 있어? 그래? 한약 먹는 구나. 어디서 지어먹는데? 아, 근데 여기 학교 앞에 무크있지?(아마 유명한 가게인 듯했다) 그 자리에 무크가 없어지고 한약방이 하나 생겼어. 거기서 약을 지어먹였더니 1년 사이에 싹 좋아졌어. 여기 목 주변 있잖아. 여기만 조금 남아있고 다 없어졌거든. 아이고... 그런데 자네는 좀 심하네. 비누를 어성초 비누로 바꿔 봐. 그리고 내가 말한 한약방도 꼭 가보고. 한약방이름이 xx한약방이거든. 꼭 가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는 사이 내가 타야할 버스가 도착했다. 아직은 한참 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아주머니께 죄송하다는 의미로 목례를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잠깐의 소동이 그렇게 지나갔다.

버스 한 구석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지난 날을 회상했다. 지난 날이 눈 앞에 파노라마처럼 다시 펼쳐졌다. 아주머니와 만남이 옛기억을 불러온 것이다. 언제나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내 주변에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 흉측한 겉모습 때문에 나를 피했다. 몇몇 사람들은 흉측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를 걱정하고 도와주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점은, 보통사람과 다른 '이상함'과 '다름'을 느낀 사람이 내 쪽을 곁눈질하는 눈빛이 싫어서 불편해 했고, 나를 걱정하는 사람은 내게 과도하게 관심을 보인다는 이유로 마뜩찮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모습, 내 외형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그 모두가 싫었던 것이다. 사람의 내면보다 외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게, 그 관심이 일정 수준 이상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한다는 사실이 짜증났던 것이다. 옛적의 나는 거의 언제 어디서나 불쌍하거나 도와줘야 할 사람이거나 혹은 혐오스럽거나 피해야 할 사람으로 그들의 눈에 비춰졌고, 내가 그들의 입맛에 맞게, 사회가 요구하는 '평범한 일반인'에 맞도록 '아프지 않고, 적절히 가꾸어진 상태'가 되지 않으면 그들과 평등하게 한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생활할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곤 했었다. 꼭 나 자신이 영화 『엘리펀트 맨(Elephant Man) 1980』의 주인공처럼 여겨지거나, 유니세프의 구호운동 모금 포스터에 인쇄될 인물이 되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곤 했던 것이다. 그들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나는 사람의 외모에 대한 그들의 다양한 시선 폭력에 시시각각 거북한 마음으로, 때로는 구역질감을 느꼈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보통 사람들과 같다) 여기저기서 쫓겨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내 구토감은 더욱 심해졌다.

한 번 생각해보자. 장애인이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작은 것부터 거대한 것까지 다양한 요구사항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사항은 '자신들을 보통 사람과 다르게 봐주지 말아 달라'는 것 아닐까.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나누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누고, 더 나아가 남자와 여자, 청년과 노인, 부자와 빈자 등으로 끝없이 '나'와 '너'를 구분지으며 이를 토대로 상대를 편견으로 짓누르려는 자세가 문제인 것이다. 끝도 없이 사람을 줄 세우고, 편을 가르고, 상대를 비하하는 것, 나는 옳으나 너는 틀렸고 나는 괜찮지만 너는 문제야 라는 그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린 편견을 거둬달라는 게 장애인이 사회에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메세지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내가 도와줘야 하는 상대이거나, 함께 있으면 불편하니 멀리해야 할 사이이거나, 혹은 저 사람들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별 세계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편견이 너무도 이 세계에 자연스럽게 퍼져 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행동에도 우리의 인식 깊숙한 곳에 있는 이러한 편견 때문에 언제든지 활화산처럼 폭발할 수 있는 차별어린 생각이자 위선적인 행동이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주머니의 말보다 말하는 의도와 따뜻한 마음이 먼저 보이는 지금에는 불편한 마음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고생한 사람이 고생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법이니까. 좀 전에 "말씀 고맙습니다." 했던 것은 결국 "마음 고맙습니다."와 같은 말이다. 나는 타인의 시선에 주눅들거나 불편할 시기를 지났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아토피는 아니더라도, 이 사회에 수많은 '시선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살이 쪘다는 이유로, 옷을 허름하게 입었다는 이유로, 정신적/육체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등등등 수많은 이유로, 그러니까 다수가 정한(과연 누가 정한 걸까) '보통'의 기준에 들지 못한다는 이유로 늘 어디선가는 차별을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에서도 본 적이 있다. 외모가 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젊지 않다는 이유로 채용에서 밀리고, 근무하면서도 차별받고, 시선, 언어로 비하당하는 일이 너무 흔하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미성숙한 사회인가. 씁쓸한 현실이다.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보이는 것으로 차별하고,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줄 아는 이 시대가. 우리 사회의 성숙도는 사회 곳곳에 자리한 '고정관념'과 '편견' '불평등'이 얼마나 사라졌는가에 따라 판가름나지 않을까. 어린왕자에게 여우는 말했다.


"안녕, 잘가... 참, 내 비밀을 말해줄게. 아주 간단한건데... 그건 마음으로 봐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생택쥐페리 『어린 왕자』

2017. 10. 9.

최은영 쇼코의 미소

변화는 일상에서 조금씩 일어난다

가족은 언제나 가장 낯선 사람들 같았다. 어쩌면 쇼코는 나의 할아버지에 대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알았을지도 모른다. p.14 

소유의 일상에 쇼코가 스며들었다. 일주일이었다. 그 일주일이 할아버지를 들뜨게 했고, 소유의 머릿속에는 쇼코만 떠다니게 했다. 이후 둘은 쇼코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작은 변화였다. 극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전환이었다. 변화는 시간의 흐름 속에 녹아 있었다.

소유의 삶과 쇼코의 삶은 닮은 듯 달랐다. 소유는 엄마, 할아버지와 지내고, 쇼코는 고모와 할아버지랑 함께 살았다. 쇼코는 자신을 공주처럼 때로는 여자친구처럼 대하는 할아버지가 싫었고, 소유는 무뚝뚝하고 무심한 듯 함부로 말하는 할아버지가 싫었다. 소유는 꿈을 쫓았고, 쇼코는 안정을 쫓았다. 마지막으로 쇼코는 자신과 가족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소유는 가족을 낯설어 했다.

소유는 그런 쇼코를 늘 떠올리면서도 이상하게 반감을 가졌고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무뚝뚝한 할아버지와 대단한 우정을 느끼는 것도, 우연히 뉴욕에서 쇼코의 소식을 듣고 일본 집에 방문했을 때 얼이 빠진 듯한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것도, 자신에게는 어두운 내용만 써 보내고 할아버지에겐 밝은 내용만 쓰는 것도 모두.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p.25 

그러나 대단하다 여겼던 쇼코가 변한 것을 본 소유는 이상야릇한 우월감을 느꼈다. 쇼코는 영화감독의 꿈을 쫓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삼켰다. 소유는 시간 앞에서 무력했다. 지난 오년 동안 꿈에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했다는 것도 모자라 돈에 치이고 현실에 치여 "매일매일 괴물같은 자의식만 몸집을 키웠"다. 그녀에게 꿈은 현실을 좀먹는 벌레였다. "창작이 나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고, 나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것이고, 내가 머무는 세계의 한계를 부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재능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대낮에 할아버지가 소유의 자취방에 찾아왔다. 졸업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쇼코에게 왔다는 편지를 건넸다. 편지에서 쇼코는 우울증을 앓았었다고 고백한다. 소유가 방문했을 때 이상하게 보였던 것도, 험한 말을 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편지를 읽는 소유에게 "그래도 하고 싶은 걸 하는 네가 참 멋지다"라는 빈 껍데기 같은 말을 하고 돌아서 간다. 그러나 서로는 안다. 녹록치 않은 현실을, 꿈과 다른 현실을, 그들은 눈물을 애써 목구멍 밑으로 삼켰다.

얼마 후 소유의 할아버지는 임종을 맞이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소유는 엄마와 화해하고, 할아버지와 엄마의 삶을 더욱 깊이 이해했다. "할아버지는 평생 좋은 소리 한 번 하는 법 없이 무뚝뚝하기만했는데 그게 고작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니" 소유는 쇼코를 만나 할아버지와 주고 받았던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소유를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는 걸 전해 듣는다. 기실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엄마와 화해하고, 자신을 알아갔던 것 모두 쇼코 덕분이었다. 쇼코는 그녀 말대로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는 않았다. 그렇게 소유는 쇼코와 작별 인사를 건네고 돌아선다.


최은영 작가를 처음 접했다. 그녀의 글은 덤덤하다. 슬픔은 있지만 절규는 없는 그런 글이다. 산채비빔밥같다. 일상에서 가꾼 재료들로 과한 양념을 하지 않은 채 내놓은 요리같은 글이다. 거의 모든 이야기가 그랬다. 문학적인 문장이 쓰이지 않고도, 비범한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고도,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야기 또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를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 읽는 동안 일상을 대단히 사랑하는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소하지만 거기에서 모든 매력을 찾아내고 뽑아낼 줄 아는 그런 사람. 오늘 담백한 요리 한 편을 맛있게 읽었다.

2017. 10. 1.

리뷰 (어쩌다 보니 이곳에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


가엾게도 아버진 이러저러한 걱정과 번민과 실패 때문에 극도의 고통을 맛보고 의심많고 성급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곧잘 절망에 가까운 상태에 빠져서 자기 몸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감기에 걸려 갑자기 병상에 눕더니, 그다지 오래 앓지도 않고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게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어서 우리는 4, 5일 동안 멍한 채 제정신이 아니었을 정도였어요. 어머닌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아, 전 어머니가 그대로 미쳐 버리지나 않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마치 땅 속에서 솟은 듯이 빚쟁이들이 한꺼버넹 들이닥쳤습니다. 우리는 집에 있는 건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주어 버렸습니다. 페테르부르크에 있었던 우리의 작은 집은 이곳으로 이사온 지 반 년쯤 지나서 아버지가 산 것이었습니다만 그것마저 팔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것은 어떻게 처분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살 집도 없거니와 먹을 것도 없는 형편이었어요. 어머닌 무서운 병으로 신음하고 계시고, 우리는 입에 풀칠도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생활의 방도도 별달리 없었으므로 다만 파멸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전 그때 열네 살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채수종 옮김, 375쪽, 동서문화사, 2011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소설을 쓰는 것일까요? 이런 게 무슨 빌요가 있다는 겁니까? 그러면 독자 중의 누군가가 대신 이 가난뱅이 나에게 외투라도 만들어준답니까?
427쪽


아아, 나의 소중한 분! 불행이란 꼭 전염병 같은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피해서 더 이상 전염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430쪽


대체 책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건 참말인 것저럼 쓴 거짓말투성이입니다. 소설이라는 것도 그저 한가한 사람에게나 읽히기 위해 쓴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437~8쪽


나를 파멸시키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이런 세상의 푸대접입니다. 그 쑥덕거리는 험담, 그들의 냉소와 심술궂은 농지거리, 그런 것들입니다.
451쪽


저는 당신 단 한 분만을 위해서 살고 있고, 그래서 이렇게 곁을 떠나지 않는 거니까요. 그런데 최근의 당신은 어떻습니까! 제발 훌륭한 어른이 되어 주세요. 불행에 굽히지 말고 꿋꿋이 버티어 주세요.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는 것을 잊지 말고요.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한때에 불과한 일이 아니겠어요! 하느님께서 잘 보살펴 주실 겁니다.
455쪽


나는 친척도 아무도 없는 당신에게서 받은 돈을바라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자신은 손에 화상을 입고, 당장 굶어 죽을 형편이면서도 내게 담배를 사라고 편지를 주셨으니, 이런 경우에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요? 아니면, 차라리 양심 따위는 눈을 감아 버리고 도둑놈처럼 천애 고아인 당신을 빈털털이가 되도록 돈을 빼앗아 써야 하는 걸까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아주 기운이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나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인간이다, 이 구두창보다도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무언가 의의라도 있는 인간인 듯 생각하는 것은 전혀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뿐 아니라 나 자신을 어쩐지 주책없는, 어느 정도 비열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자기의 장점과 품위를 부정하게 되자,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이 한번에 와르르 허물어져서 진정한 타락이 시작된 겁니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일 뿐,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457쪽


고르쉬코프가 들어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속눈썹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 있고 다리를 덜덜 떨기만 할 뿐, 입도 제대로 벌리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나는 우선 그를 다 망가진 의자에 앉히고 차를 권했습니다. 딴 의자라곤 없었으니까요. 그는 죄송하다고 계속 사양하더니 겨우 찻잔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설탕을 넣지 않고 마시려고 해서 설탕을 넣어야 한다고 권했더니, 또 사양하더군요. 그래서 넣으라니 괜찮다느니 거의 다투다시피하다가 결국 제일 조그마한 설탕 부스러기 하나를 찻잔에 넣고는 몹시 달다고 하는 겁니다. 가난이라는 것은 이렇게까지 사람을 비굴하거 만들더군요!
469~70쪽


"당신 자신도 궁색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려주실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만, 극히 조금이라도 좋으니 빌려 주십시오. 이렇게 뻔뻔스러운 부탁을 드리러 찾아온 것도 당신의 다정한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나는 대답했습니다. "기꺼이 빌려 드리고 싶습니다만, 내게는 한푼도 없습니다. 전혀 무일푼입니다." "(...) 아내와 아이들이 허기에 떨고 있으니 10코펭카 은화 한 푼이라도" 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가슴이 죄어드는 듯 했습니다. 정말 나보다도 훨씬 비참하구나! 하고 생각은 했지만, 내 수중에는 20코페이카밖에 남아 있지 않고 그것도 당장 써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내일 꼭 필요한 일에 쓸 작정이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군요." "마카르 알렉세예비치, 제발 좀 생각해 주십시오. 10코페이카면 족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울며 매달렸으므로 나는 책상 서랍에서 그 귀중하게 보관했던 20코페이카를 꺼내어 주었습니다. 전 재산을 집어던진 셈이지요! 이것이 가난이라는 겁니다!
4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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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작인 이 소설이 가슴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은, 내가 제부쉬킨처럼 자신이 파멸에 이를 정도로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해보지도 못해서일까. 그보다 아마도, 혹독한 가난을 겪고 있는 마카르가 가진 돈 대부분을 바렌카에게 내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에게 비루한 소리까지 들어가며 돈을 꾸러 다니는 그 처절하고도 안타까운 상황을 보면서, 한편으로 바렌카를 도와주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자기를 학대하고 술을 퍼마시는 모습에서, 그러면서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인 코르쉬코프에게 서랍에 놓아둔 마지막 돈까지 탈탈 털어주는 눈물겨운 상황이,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를 돕다가 이 모두가 가난에 짓눌려 죽어 버리고 마는 냉혹한 현실이 너무도 차갑게 다가와서일 것이다. 무엇보다 바렌카는 마카르의 헌신을 뒤로한 채 지주 브이코프에게 시집을 가는데, 이 시점에서 나의 거북함은 최고조에 달했다. 1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지병에 시달리는, 삯바느질에 표도르브나에 얹혀 살며 괴로워 하는 바렌카에게 찾아온 구원은 다른 것이 아닌 돈이었던 셈이었으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 지쳐 사랑조차 사치로 여겨지기 마련이고,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고의 방편은 다름 아닌 갑부에게 시집을 가버리는 일이었으니, 이는 죄와 벌의 듀나가 가족을 위해 선택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가난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일 수밖에 없다는 말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거북했다.

그러나 거북함은 진실을 볼 때 생긴다는 것을 나는 안다. 진실은 거짓보다 텁텁하고 재미없고 고통스럽고 불쾌하고 거북하다. 우리가 진실을 바로 보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구역질나게 하기 때문이다. 깊이 보면 볼수록 역겹고 드러운 인간과 세계의 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실이 자신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슬프게 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카르는 왜 살았을까. 47살에 남루한 하숙집의 부엌 한 칸을 빌려 살면서도, 왜 죽지 않고 살았을까. 역설적으로 그에게는 바렌카를 향한 사랑이 그를 살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돈을 잃고 자신이 비참한 처지가 되어도, 혹은 자신이 끝내 파멸하더라도 끝끝내 지키고 싶은 단 하나는 '사랑'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랑'만이 지독한 현실에서도 사람을 살게 하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마카르 제부쉬킨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바렌카는 결국 5천 루블은 껌 값 정도로 여기는 브이코프에게 시집을 간다. 나를 기억하고 잊지 말아달라는 말과 함께. 마카르는 마지막 편지에서 떠나지 말아 달라며 울부짖는다. 소설은 마카르가 "나의 사랑하는 바렌카!"를 외치며 절규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마카르를 토대로 훗날의 라스콜리니코프나 스비드리가일로프와 같은 인물이 파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읽고 나니 라스콜리니코프가 두냐가 돈 많은 루쥔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궁핍한 상태에 있는 가족을 도우려 한 사실을 알고 가슴 속에 증오심을 품을 정도로 흥분하며 반대한 모습이 더욱 잘 이해되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이 결혼은 비열한 짓"이라고 하는 말은 "굶어 죽을지언정 '사랑'을 택해!"라는 말과 다름없음을 느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감화된 것도, 기독교적인 구원을 얻게 되는  것도, 바로 사랑, 참사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14살에 이미 아버지가 가난으로 죽고, 먼 친척 집에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모욕당하고, 흠모하던 포크롭스키는 결핵으로 세상을 등지는데다, 바렌카 자신은 삯바느질로 연명하면서도 돈이 없어 제부쉬킨에게 돈 좀 부쳐달라며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면, 돈보다 사랑을 택해라는 말이 과연 쉬운 말일까.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항상 자기파멸적이다. 주인공들은 늘 고뇌에 차 있고, 궁핍하며, 어떤 두 가지의 가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데, 그것을 선택하면서도 병적으로 걱정하고 근심에 잠긴다. 어떤 인간(지하로부터의 수기)은 늘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기도 하고, 이 소설처럼 자기를 파괴해가면서까지 헌신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인간은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시험하면서도 죄의식에 끝없이 시달리기도 한다. 다른 소설들에 비해 인물이 더 살아 숨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내면을 끝없이 파내어 드러내 보여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의 현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7. 9. 21.

보통 사람의 보통 삶, 그들이 엮어가는 보통의 일상이 내 마음을 뒤흔든다. 퇴근한 아버지를 기다리며 엄마는 보글보글 밥과 국을 짓고, 아이들은 거실에서 놀이를 하며 장난을 치는 일. 아무것도 아닌 듯 엄청난 그 일이 내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17.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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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기억.

주말 동안 아팠다. 그것도 심하게. 얼굴 전체가 시뻘겋게 변했고, 코감기 때문에 계속 콜록거렸다. 아픈 내역에 대해 주저리 쓰는 건 의미없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았다는 사실이고 그것을 나는 어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나는 하루종일 방구석 이불 위에 누워있어야 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초저녁부터 불을 끄고 잤다. 정확히 말하면 자는 것도 아니고 자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로 누워있었다. 그 상태가 오늘 12시까지 계속되었다. 잠이 들지 않았다. 잠들었으면 덜 아팠을 텐데. 비몽사몽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시간은 스스로 물러가지 않았다. 나는 내몸과 사투했고 어둠에 파묻혀 시간이 흐르길 바랬다. 아무리 빨리 가길빌어도 시간은 제 시간만큼 흘렀다. 1분이 반으로 쪼개어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늘 1분은 1분만큼 흘렀고, 나는 딱 그만큼 괴로웠다. 그렇다고 일어날 힘이 있지도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으며 팔다리는 내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나에게 갇혀 있었다. 어제는 완연한 감옥이었다. 나는 그것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1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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